수원 화성은 정조대왕의 철학이 고스란히 깃든 도시였다. 정조대왕이 화성을 건설한 것은 아버지의 묘를 옮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편리하고 번창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파를 통제하고 강력한 왕권 확립을 목표로 삼기도 했다. 화성 건설을 통해 개혁정치를 펼치고, 실제 학자들을 비롯한 인재들을 고르게 영입하려 했던 것이다. 화성의 건설에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던 정조는 화성의 설계를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이자 작가인 정약용에게 맡겼다. 실학과의 초기 만남을 가진 정약용은 전통적 방법을 바탕으로 중국을 거쳐온 서양 도시 관련 서적을 참고해 화성을 설계했다. 정약용은 1년여의 연구 끝에 도시의 기본틀과 구체적인 건축방법을 상세히 기술한 '성설'이라는 보고서를..
수원화성의 축성은 정조대왕의 효성에 시작되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장헌, 왕세자)는 조선 왕조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영조의 차남인 사도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당쟁을 희생하고 궁지에 몰려 죽었다. 정조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했다. 정조대왕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깊이 헌신했지만, 슬프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효도 또한 대단했다. 정조가 즉위하자 사도세자의 묘를 '수은묘'에서 '연우원'으로 개칭하였다. 몇 년 뒤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지금의 서울 휘경동)에 있는 사도세자의 무덤이 명소로 꼽히는 수원(지금의 경기도 화성)의 화산으로 옮겨졌다. 묘의 명칭은 '영우원'에서 '현릉원'으로 바뀌었다. 그 후 사도세자에게 장조(張祖)라는 칭호가..
수원 화성은 조선 후기에 건설된 계획도시다. 개혁적 통치자인 정조대왕과 학자들이 건설한 성곽도시로 조선 후기 토목공학의 백미로 꼽힌다. 수원 화성은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자연관과 통치이념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예술성과 과학, 경제성을 생각하도록 축조되었다. 자연환경을 제대로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설계부터 시공까지 신기술과 장비를 활용해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달성했다. 수원 화성도 예술성이 뛰어나다. 웅장한 문과 베니어, 그리고 공심돈의 건물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수원 화성의 특징은 동서양 건축의 만남이다. 화성은 동양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서양식 건축 방법과 건축 장비를 사용하여 완성되었다. 화성을 건설하는 전 과정을 기록한 책도 중요한 자랑거리다. 설계부터 인력과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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