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은 동서양의 요새도시들을 결합해 만들었지만 중국이나 유럽에 건설된 도시와는 많이 다르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주어진 자연환경을 이용해 성을 쌓았다는 점이다. 자연이 부여한 지형은 다른 어떤 건물보다 튼튼해 쉽게 파괴될 수 없다. 정약용은 화성을 설계할 때 이런 점을 먼저 고려했다. 화성은 지형을 따라 자연적인 모양을 하고 있어 견고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얼핏 보면 화성은 계획된 도시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도시인 것 같다. 언덕을 따라 성곽을 쌓았기 때문이다. 성곽의 높이도 다르다. 주변 지역에 비해 능선을 따라 난 벽은 높이가 낮고, 주변보다 낮은 곳은 벽이 상대적으로 높다. 화성의 성곽과 그 주변에 세워진 모든 시설도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축조했다. 화성에는 총 48개의 다른 시설이 있었..
화성이 설치되기 전에는 우리 나라의 성곽을 전쟁에 대비하여 쌓은 읍성과 성곽으로 나누어 백성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읍과 촌에 살다가 적이 쳐들어오자 목숨을 버리고 산성으로 건너가 적과 싸웠다. 그러나 화성은 읍과 산이 모두 있는 성곽 도시였다. 즉 생활공간이자 적과 싸우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전통적 요새와 서구적 도시라는 개념이 결합된 새로운 개념의 계획도시였다. 화성은 군사기능 못지않게 사람들의 생명이 중요한 도시다. 화성이 한양, 충청, 전라도, 경상도 사이에 있다는 점을 고려해 전국 상인들이 모여 거래할 수 있는 길을 새로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소상인들이 대량의 상품을 거래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가난한 상인들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었다. 무역을 가능하게 하는 ..
수원 화성은 정조대왕의 철학이 고스란히 깃든 도시였다. 정조대왕이 화성을 건설한 것은 아버지의 묘를 옮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편리하고 번창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파를 통제하고 강력한 왕권 확립을 목표로 삼기도 했다. 화성 건설을 통해 개혁정치를 펼치고, 실제 학자들을 비롯한 인재들을 고르게 영입하려 했던 것이다. 화성의 건설에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던 정조는 화성의 설계를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이자 작가인 정약용에게 맡겼다. 실학과의 초기 만남을 가진 정약용은 전통적 방법을 바탕으로 중국을 거쳐온 서양 도시 관련 서적을 참고해 화성을 설계했다. 정약용은 1년여의 연구 끝에 도시의 기본틀과 구체적인 건축방법을 상세히 기술한 '성설'이라는 보고서를..